“Oh, captain, my captain.” 키팅선생님이 학교를 떠날 때 학생들은 책상위로 올라가 그를 향해 외쳤다. 키팅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미소를 띄우며 “Thank you, boys. Thank you.” 라고 말하고 학교를 나섰다. 주입식 교육에 지친 아이들에게 인간애와 자유로운 정신을 일깨워 주었던 키팅선생님. 그는 학부모와 교장선생님과는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지만 학생에게는 참스승 이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나의 현실을 돌아보고 분노했으며, 학생들이 책상을 밟고 서는 모습에서 환희를 느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적에 이해찬씨가 교육정책을 발표했다. 여러 가지 말 중에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야간자율학습 폐지였다. 밤10시 이전에는 집에 보내주지 않기로 유명했던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나로서는 쾌재를 부를만한 일이었다.
나의 기대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첫날 무너졌다. TV 뉴스에 나온 것과는 다르게 야간자율학습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부모님의 동의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동의서에 서명을 받아오지 못하면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하시겠다고 하였다. 부모님은 나의 예상대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서명해 주셨다. 아침 7시 30분 등교, 밤 10시 하교의 지루한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입학 후 한달 간 나는 감옥 같은 학교를 잘 다녔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잘 갔다 잘 왔다는 거다. 하지만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전날 죽은 시인의 사회를 감명 깊게 본 내가 당당히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단독 범행이었다. 월요일 저녁 급식을 먹고 나는 학교 담장을 넘었다. 학교를 나와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도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교실에서 학생을 단번에 개조시킨다는 새마을 펀치로 유명한 선생님께 정신을 못 차리도록 맞았다. 순간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던 아픔이 아직도 남아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누군가가 교육청 홈페이지에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것을 신고했다. 당장 타율적인 자율학습은 못하게 되었고, 하고 싶은 사람만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자율학습을 하게 되었다. 다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문제집, 교과서였고 소설책이나 신문을 읽다 감독 선생님에게 걸리게 되면 그것들을 압수당했다. 나는 당연히 학교에 남지 않았다.
일년 뒤, 친구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제부터는 공부해야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알아서 학교에 남았고, 나는 혼자 학교를 나섰다. 학교에 남지 않은 학생은 나와 운동부뿐이었다. 일찍 나온 학교 밖은 심심했다. 처음엔 오락실에 갔고, 그 다음엔 게임방에 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시립도서관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교과서에는 중략되어있는 소설을 찾아 읽었고, 신문을 완독했다. 성적은 반에서 중간도 안되었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진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집을 푸느니 책을 읽고 내가 느끼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했다. 지금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학교처럼 반항할 것이라고 있으면 좋겠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없다. 아니 그런 것이 있다 해도 지금 나에게는 열정이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야 한다. 취업이 코앞이라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래야 내가 지금 즐거울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아이들 중 한 명이 연극을 하기 위해 학교를 뛰쳐 나갔던 것처럼 나는 열정을 갖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키팅선생님이 죽은 사람들의 사진에 귀를 대면 들린다던 가장 중요한 그 말 “carpe diem”-현실을 즐겨라-을 나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2007. 12. 4.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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